흑백의 세계
휴대폰을 사용한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평소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도 휴대폰을 보는 나쁜 버릇을 고칠 생각은 않고, 며칠 전 휴대폰 환경 설정 창에서 이른바 ‘보기 편한 모드’라는 걸 발견했다. 화면을 블루 라이트를 조정하여 눈의 피로를 줄여 준다는 기능이란다. 그런데 그 설정 화면을 보니 블루 라이트 필터 값을 조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휴대폰 화면을 흑백으로 만들어 주는 버튼도 있길래 사용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휴대폰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크게 유용한 기능은 아니지만, 예전의 스마트폰 이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이후로 시간 날 때마다 흑백 화면으로 전환해서 사용해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 분명 세상은 여러가지 색깔로 가득차 있고 손바닥 만한 휴대폰 화면만 흑백으로 보일 텐데, 흑백 화면으로 바꾸어 휴대폰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휴대폰 바깥의 세상도 흑백으로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잘못 보았나 싶어서 휴대폰 화면과 그 주위를 번갈아 보아도 여전히 마찬가지. 잠깐 동안이긴 해도, 온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어 있다. 물론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세상은 색깔로 채워진다. 그런데 한동안 휴대폰을 응시하면 여지없이 그 바깥 세상도 함께 흑백이 되어간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 약간의 관찰을 해 보았는데, 처음부터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휴대폰을 응시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휴대폰 화면에서 가까운 바깥 세상부터 점점 색깔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정확히 경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 마치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흑백의 세계는 색깔을 밀어내며 차츰 주위로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간다. 이 현상이 재밌기는 한데, 동시에 드는 생각이, 이런 현상 또는 감각의 혼동은 분명 내 눈이 바깥 세상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눈의 피로를 덜고자 흑백 화면을 보는 행동이 오히려 눈의 피로를 더 가중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게 옳은 일인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아무튼 신기한 생각에 몇 번 실험을 해 보았으나, 결론적으로 눈이 최소한 건강해지는 느낌은 아니라서 이 흑백 화면을 계속 보는 게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한두 번은 재미로 할 수 있다 쳐도, 이 흑백 놀이가 지속 가능한 유희가 되기에는 한계효용이 너무나 확실하게 체감하는지라, 이쯤에서 철수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렴 휴대폰을 안 보는 것보다 더 좋을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