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
어지간하면 물러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이번 두통은 완강하게 눌러 앉았다.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종류의 통증에 장사 없다는 것이 오랜 경험이 가져다 준 교훈이다.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호환마마가 최대한 피해를 덜 주고 지나가길 바라듯이 기다려 볼 뿐이다.
그래도 이번 통증이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시나브로 스며드는 여느 두통과는 달리 언제 어디서 이것이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토요일 저녁, 운동 삼아 불광천佛光川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설 때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 이걸 깜빡해 버렸다. 수색水色 근처에서 반환점을 돌았을 때 약간 불편함을 느꼈지만 보통 때라면 그 지점부터 집까지 걸어서 40분. 중간에 화장실을 안 가도 충분한 시간과 거리였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던 것이 옷을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고, 이러다간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경험적으로 보아, 조금 힘들긴 해도 집까지 못 갈 건 아니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곧장 집으로 갔으면 예상대로 큰 문제 없었을 것이다. 도중에 부부가 길을 나누어 아내가 친정에 들렀다가 오기로 하고 난 집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하기로 하여,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마트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마트부터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5분 남짓. 중간에 알려진 화장실은 없다. 거의 뛰다시피 잰 걸음으로 걸어 지하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온 신경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급기야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내 스스로 패닉 상태가 왔다는 걸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머리 위쪽으로 피가 솟구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쿵쾅거리는 맥박 소리가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점점 더 두통의 강도가 커지더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에는 화장실이 급한 게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후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내상을 크게 입었는지 이 통증은 며칠째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두통의 원인은 확실해 보인다. 피가 갑자기 머리로 몰리면서 핏줄이 놀란 것 같다. 드라마에서 회장님들이 놀라서 쓰러지는 게 결코 리얼리티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었음을 새삼 느낀다. 두통약도 한 가지로는 소용이 없어 여러 종류를 섞어 먹었더니 그나마 효과가 있다. 평소 먹던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약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 추가로 아스피린과 덱시부프로펜까지 먹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완전히 터널을 통과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여전히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찾아오는 두통. 물론 첫날 만큼은 아니지만,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한, 집중을 방해하기에는 넉넉할 만큼의 아픔이 계속 곁에 머무르고 있다.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병원에 가 보라는 아내. 그러나 두통으로 병원에 가 본 적이, 그리고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냥 두통약 처방이나 내려 주겠지 뭐. 의사들을 불신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이 증상은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가야 하는 짐인 것 같다. 어쩌겠냐고.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