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일주일 넘게 기승을 부리던 강추위가 어제부로 조금 물러난 것 같다. 보통은 연말연시라고 해 봐야 큰 감흥은 없는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온 가족이 시내에 다녀왔다. 작은딸이 명동성당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길래 오랜만에 그곳을 가 보기로 했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날이 날이니 만큼 성당에 방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
성당뿐만 아니라 그 동네 자체가 오랜만이라 오늘 나가는 김에 칼국수도 먹고 식사 후에는 청계천도 한 번 걸어 보기로 동선을 짜고 나갔다. 버스를 타고 서소문 앞에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아직 추위가 다 물러가지 않아서 거리에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롯데백화점 쪽으로 걸어가니 인파가 몰려드는데, 이건 걷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에 밀려가는 거다. 아니, 명동에 원래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물론 명동이 다운타운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니 이쪽에 사람이 좀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내가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작년 할로윈데이의 이태원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우선 내 의지로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일행과 함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방향을 바꾸거나 흐름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용케 나 혼자 그 흐름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함께 간 가족과 떨어지기 일쑤였다. 경찰이 배치되어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얼핏 보기에도 동원된 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순간 사고가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성당 내부와 입구 쪽은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곳도 사람들이 더 모여들 것이 분명했고, 그저 한번 둘러볼 생각이었지 애초에 오래 머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이 불쾌한 인파 속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원래 계획했던 칼국수는 불가능해졌다. 경찰이 그 골목을 막아서서 출입을 못하게 했다.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들어가 볼까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커져서 결국 명동을 빠져나오기로 마음 먹었다. 딸들도 모두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청계천 쪽은 그나마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어서 마음을 좀 놓게 되었지만, 여전히 저녁 식사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저녁 시간이 되자 종로 일대의 거의 모든 식당 입구에 사람들의 줄이 생긴 것이다. 추위가 물러났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게는 힘든 날씨였고, 저 줄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현장 철수를 결정했다. 그동안 배고픔 견딜 수 있도록 편의점에서 초코바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서는 광화문 일대에도 사람이 많은지, 서울 사람들 죄다 여기 모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동안 연말연시에 시내에서 모임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걷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넘쳐나는 기억은 왜 없을까. 명동에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기 전에 이미 그 동네를 졸업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질서하고 혼잡한 명동은 내게 너무 낯설고 두렵다. 이제는 시내에 이렇게 나올 일도 드물어졌지만, 앞으로 누가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해도 내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연말연시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보다는 그냥 집에 있는 게 최고인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