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lor Shikiori Chushu
오랜 벗으로부터 만년필 잉크를 선물 받았다.
사람들마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평소에 괜히 들여다보는 품목이 하나 둘 쯤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바꾸지도 않을 휴대폰에 꽂혀서 새 기종 나올 때마다 스펙을 꼼꼼하게 따져 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랩탑이나 태블릿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좀 심한 경우는 살면서 몇 번이나 바꾼다고 자동차한테 그렇게 애정을 쏟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도 있다지 아마.
나도 그런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키보드와 만년필이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눈길을 주지 않지만 예쁜 키보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말할 것도 없이 안 살 거지만, 물건을 꼼꼼하게 뜯어보고 리뷰를 꼭 챙겨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그러지 말고 하나 사라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손사래를 친다.
“사려는 게 아니고, 그냥 보는 거야.”
키보드까지는 아니지만 만년필도 나름 애정을 가지는 물건이다. 매일같이 필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만년필과 키보드에는 관심의 차이가 있는데, 키보드에는 없지만 만년필은 관심을 가지는 기준이 명확히 있다. 바로 중저가의 만년필만 본다는 것. 비싼 만년필은 써 본 적도 없고, 써 볼 생각도 없다. 비싼 게 좋겠지만, 솔직히 말해 난 문구점에 나와 있는 가장 싼 만년필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잘 만들지 못한, 그래서 필기감이 나쁜 것들까지 사랑할 수는 없지만. 수십만 원짜리 만년필은 왠지 그걸 사용하는 사람도 손목에 금테를 두르고, 거창한 글을 써 내려가야만 할 것 같아 좀 부담스럽다.
수성 볼펜은 어떠냐고 묻는 사람이 있던데, 이상하게 그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가질 않는다. 만년필이 주는 필기감과 아주 흡사한 볼펜도 경험해 보았지만, 그리고 매우 신통방통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다. 볼펜은 볼펜일 뿐, 만년필이 아니다. 이게 웬 차별이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일단 그 둘이 아무리 비슷해도, 공이 굴러가면서 내는 필기감과 펜이 종이에 긁히면서 내는 필기감이 같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난 잉크가 떨어지면 충전하는 과정을 포함해서, 심지어는 쓰는 도중 갑자기 잉크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약간의 긴장감까지 아울러서 만년필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 잉크를 충전하기 전에 묵은 잉크를 빼내고, 만년필을 분해해서 씻고, 그것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다. 요즘은 편리함 때문에 잉크 카트리지를 많이 쓰던데, 난 비상용으로 하나 들고 다닐 뿐, 대부분은 잉크를 직접 충전해서 쓰는 걸 좋아한다.
며칠 전 벗을 만나 좋은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나로서는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약속 장소에 오는 길에 봤다면서 이 언니가 날 잉크 전문점에 데리고 가더니 만년필 잉크를 선물해 주었다. 가게에 들어서서 깜짝 놀랐는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잉크가 있는 줄 몰랐다. 그동안 내게는 그저 검정색과 파란색 잉크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물론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여러가지 색깔의 잉크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봐야 손에 꼽을 정도라고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자주 쓰는 검정색과 파란색의 변주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매장에서 보니 이건 완전히 또 하나의 세상이 아닌가.
내가 고른 잉크는 SAILOR의 SHIKIORI CHUSHU(仲秋)라는 색이다. 말 그대로 가을색이라는데, 보라빛이 도는 진한 회색의 잉크다. 위에서 말한 기본 색깔만 써 본 나로서는 이렇게 본격적인(?) 이름이 들어간 잉크는 처음 접해 본다. 어떤 만년필로 잉크를 시험해 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많이 쓰는 플래티넘 프레이져를 골랐다. 세필에 특화되어 있어 노트 필기나 책에 바로 메모하기에 좋은 물건이다. 아무튼 직접 써 본 결과, 처음엔 너무 연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 보면 볼수록 색깔이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검정색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런 회색 계통의 잉크가 물이 섞여서 이런 색이 나오는 게 아닐까 했던 것 같다. 단순히 회색이었으면 좀 심심했을 수도 있는데, 보라색이 살짝 돌면서 뭔가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글씨를 써 놓고 보니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한 것 같다. 물론 자주 볼 수는 없다 해도, 난 우리가 이렇게 오래 볼 수 있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잉크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오래 볼수록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선물해 준 벗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