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가 되어 풀풀 날리는 멘탈을 부여잡기 위해 키보드 청소를 시작했다.

연말에 대형 사고가 나 버렸다. 무심코 설정 파일 하나를 잘못 건드는 바람에 OS 구동이 안 되는 게 아닌가. 호스트 OS가 아니라 가상 환경에서 돌아가는 게스트 OS이긴 해도, 모든 작업을 그곳에서 하다 보니,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거기가 본진인 셈이다. 한 번 맛이 가버린 OS는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설치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귀찮은 정도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지만, 내가 작업해 놓은 건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그러길래 애초에 왜 괜히 손을 대 가지고 이런 비극을 만들었는지. 한심하다 정말…

아무튼 당장 복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에는 단순 노동이 필요한 법. 올해로 거의 15년 째 사용하고 있는 키보드의 키캡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큰딸에게 줬다가 이번에 다시 빼앗아 온 리얼포스 87 무접점 키보드다. 텐키리스의 장점을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크다. 그래도 아직 이만한 키감을 찾기가 어려워서 쉽게 내치지 못한다. 키 하나가 눌러지지 않는다면 몰라도 이걸 어떻게 버릴 수 있겠나.

가지고 있는 다른 키보드는 그동안 심심찮게 청소를 해 왔는데 이 녀석은 내가 직접 관리를 하지 않다 보니 캐캡을 뜯어서 하는 청소는 정말 오랜만이다. 아 그런데 키보드 상태가 말이 아니다. 더러움의 정도를 1에서 100까지라고 수치화할 수 있다면 이건 거의 120에 가깝다. 이 상태로 키가 눌러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물티슈, 알콜 등등으로 닦아내도 소용 없다. 뜨겁게 열처리를 하면 될까. 하지만 그러다가 이미 노년이 된 키보드가 아예 망가질까 두려워 이 정도만 하고 그냥 덮기로 했다. 그리하여 새해를 맞이하여 제대로 목욕을 시켜주려 했으나, 없었던 일로 하고 그저 키캡만 닦아서 이대로 살기로 했다. 키보드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어쩌겠나.